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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미애 댓글 0건 조회 3,698회 작성일 04-01-14 16:00본문
이곳에 전개되는 내용은 실제의 일입니다.<br />
여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습니다. 남자는 25세이고 여자는 21세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했고, 그 둘은 2년 6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했습니다. 남자는 나름대로 가정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자는 아이가 생길 때까지 직장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자주 여러가지 일에 의견 차이를 보이고 말다툼을 했지만 결혼생활이 의례 그런 것이려니 하며 유지해나갔습니다. 다른 부부들에 비해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던 것이며,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여자의 대화노력에도 ‘됐어’라는 한마디로 대화의 물꼬를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여자도 석연찮은 구석은 있었지만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더 행복해 보였지만 여자의 가슴에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과 세상에 대해 자신 없음이 짙어지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원래 신앙을 가졌었지만, 결혼을 하면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어떤 여건이나 상황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보통의 남자들이 그렇듯 이 남자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T.V가 그의 낙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설거지를 하다, 밥을 먹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도 자주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T.V를 보며 마냥 즐거워하는 남편의 등을 바라보는 것도,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하루종일 기다리는 것도, 친구도 하나 없이 소심하고 자신감 없이 살아가는 일상도, 모두 서글프고 한심하기만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낙이 있다면 자녀교육의 부분이었는데,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아이를 어떻게 양육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모든 교재를 손수 만들고 아이에게 익히게 하고, 최선의 노력으로 아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결과 아이는 한글을 어린 나이에 익히게 되었고,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남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업을 해보겠다며 기술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2,3개월 후 그 업종이 전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너무 힘들어서인지 기술 배우기도 중단해 버렸습니다. 회사를 나오고 1년이 다 되도록 남자는 하는 일 없이 계속 방황만 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먹고 새벽에 들어오기는 일쑤였고, 새벽까지 잠 안자고 기다리는 여자에겐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참다못한 여자가 처음으로 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했더니 그것이 화가 난다고 T.V리모컨을 벽에다 던져 박살을 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무슨 말만 할라치면 무서운 표정을 지었고 여자는 그것에 기가 질려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들에게 두 번째 아이가 생겼습니다. 여자는 생활비를 아껴보려고 자장면 한 그릇이 먹고 싶어도 돈이 아까워서 선뜻 시켜먹지 못했습니다. 남자는 알지 못했습니다. 임신한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를. 심지어 간단하게 도와줄 수 있는 설거지나 청소 같은 것도 거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궁핍한 생활 가운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여자는 두 번째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3일 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여자가 이것이 나의 잘못이냐고 울면서 이야기했더니 그제서야 남자는 완고한 등을 다시 돌렸습니다. 그렇게 둘째 아이가 백일이 될 즈음, 여자의 언니가 울산에 직장이 있다며 이사오기를 제안했습니다. 고심 끝에 남자와 여자는 울산으로 이사하기를 결심했고 2001년 3월 17일 무언가 모를 희망을 안고(남자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울산에 짐을 풀었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직장은 조건이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근무시간, 작업환경, 월급 등... 남자는 회사를 옮겨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그들의 아이들과 울산에 온지 3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동안 옮겨 다닌 곳 만해도 대여섯 군데나 됩니다. 그들이 울산에 이사 오면서 경주에 있는 여자의 언니도 함께 이사를 왔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가 가까운 곳에 있게 되니 좋은 점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에 다시 다닌 것인데, 교회를 정하기 어려워 수개월동안 떠돌이처럼 돌아다녔습니다. 처음 울산에 왔을 때 남자는 여자에게 그동안 못해준 사랑과 배려를 다 베풀기라도 할 것처럼 잘 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집안 살림을 도와준 것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울산에 오면서 여자는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강한 열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번역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고,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며, 살림을 하며,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상황적으로 너무 어려웠지만, 여자는 자신의 삶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굳혔습니다. 새벽에 깨어 공부를 하며,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 지금 다니는 교회를 동생의 권유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여자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삶을 자유케 하는 진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기 시작하자, 남자의 모진 핍박도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하는 일마다 반대했고, 여자의 모든 의견에 무시와 반박을 했습니다. 외박을 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갔고,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밖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집에서라도 꼭 술을 마셔야 했습니다. 술을 마시면 끊임없이 한숨을 토해냈고, 자주 이혼하기를 요구해 왔습니다. 아무런 삶의 대책도 없이 이혼만 하면 자신의 인생이 확 트이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남자는 좌절과 회의를 넘어 자포자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삶의 목표를 확고히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새로운 비전을 가지게 되었고, 남자가 그 모든 노력을 ‘치맛바람’이라고 비하시켜도 여자의 교육철학을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하는 공부에 대해서도 ‘쓸데없는 짓’이라며 무시하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그럴수록 여자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더 큰 열심으로 공부했고, 아이들에게도 교육계획을 하나씩 실행해 나갔습니다. 그때 남자에게는 또 한가지 나쁜 버릇이 생겼습니다. 틈만 나면 인터넷 성인 사이트에서 음란물을 즐겨봤고 밤에도 혼자 포르노 테입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궈 놓고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그 음란물을 마음껏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행태는 부부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올바르지 못한 성행위를 요구했고 여자는 그 요구에 응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시도 때도 없이 성관계를 요구했고, 공부하느라 피곤한 여자는 남자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요구를 들어줄 상황이 안 되어도 남자는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하기 원했고, 여자는 그렇게 관계를 맺고 나면 한없이 비참해지고 괴로웠습니다. 그런 기간이 어느 정도 지속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여자는 자신의 몸을 함부로 내어주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몸을 지키는 것이 정신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남자는 하룻밤 사이에도 몇 번씩 여자를 잠 못자게 했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게 됨을 알면 손찌검도 불사했고, 손톱으로 몸을 할퀴는가 하면 심지어 발로 차기까지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여자의 몸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기도 하고, 손톱에 살이 패여 쓰라린 상처가 남아 있기도 하고 온몸이 욱신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생활이 힘들어도 참다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또 남자는 최근 1년동안 생활비도 제대로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그들 집 냉장고에는 물보다 술이 더 많고, 반찬보다 술안주가 더 많습니다. 생활비를 주지 않게 되자, 여자는 아이들과 반찬 없이 밥을 먹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김치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나마 그것으로 여자는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술이 부르트고 몸이 마르는 것을 보며 여자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성장기의 영양상태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한번은 목욕탕에 가고 싶어 목욕비를 달라고 했더니 들은 척도 하지 않기에 이틀이나 졸라서 만원을 받아냈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먹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은 뭐든지 먹고, 삽니다. 그리고 수백만원씩 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즐기는 듯 했습니다. 카드이용대금 명세서속에는 술집 이름과 수십만원부터 백만원이 넘는 금액이 기재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번 돈 자기가 쓴다는 식으로 당당한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자는 남자에게 단 한마디만 했습니다. “그렇게 술 마시고 다니니까 행복해요?” 하지만 남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질문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어떡해서든 술자리를 만들려고 했고, 사람들과 만나서 술 먹고 술값 치르는 것이 자신의 대인관계를 좋게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가 자장면 값까지 아껴가며 저축한 돈을 남자는 수개월 만에 모두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또 남자는 걸핏하면 여자에게 말합니다. “니가 이제까지 가정에서 한 게 뭐야? 뭐 한 게 있으면 말해봐.” 그리고 이제 이혼을 요구합니다. 남자는 자신의 인생이 풀리지 않는 이유를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혼서류를 가지고 와서 당장 이혼하자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이혼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충격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환경이 바뀌게 되면 그들이 받게 될 충격과 상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자는 이혼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남자가 삶에 아무런 계획이나 대책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이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여자를 향해 남자는 이를 악물고 소리칩니다. “이혼 못하겠다면 네 발로 뛰쳐나가게 해주지. 두고 봐!” 남자의 악기어린 협박이 무섭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날마다 꿈을 향해 날개를 펴도 부족한 아이들에게 좌절과 상처를 줄까봐 걱정이 됩니다. 이 글을 쓰기까지 참으로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세월의 상처는 묻어두면 아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여자가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위해 전문가에게 의뢰하자고 제안했으나, 남자는 돈이 아까워서 그런 짓은 못한다고 합니다. 여자는 자신의 손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싶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면 빈정대며 비꼬기만 하고, 생각차이가 너무 심해서 더 이상 못살겠다고 그것을 이혼사유와 결부시킵니다. 여자는 아이들이 남의 손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자라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악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봐서는 안 되는 T.Vprogram을 아무 거리낌 없이 틀어놓고, 술 마시는 모습, 담배피우는 모습, 게으른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내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남자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이제 36세가 되었고 여자는 32세가 되었습니다. 결혼하지 9년째,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고 싶습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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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습니다. 남자는 25세이고 여자는 21세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했고, 그 둘은 2년 6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했습니다. 남자는 나름대로 가정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자는 아이가 생길 때까지 직장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자주 여러가지 일에 의견 차이를 보이고 말다툼을 했지만 결혼생활이 의례 그런 것이려니 하며 유지해나갔습니다. 다른 부부들에 비해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던 것이며,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여자의 대화노력에도 ‘됐어’라는 한마디로 대화의 물꼬를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여자도 석연찮은 구석은 있었지만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더 행복해 보였지만 여자의 가슴에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과 세상에 대해 자신 없음이 짙어지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원래 신앙을 가졌었지만, 결혼을 하면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어떤 여건이나 상황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보통의 남자들이 그렇듯 이 남자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T.V가 그의 낙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설거지를 하다, 밥을 먹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도 자주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T.V를 보며 마냥 즐거워하는 남편의 등을 바라보는 것도,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하루종일 기다리는 것도, 친구도 하나 없이 소심하고 자신감 없이 살아가는 일상도, 모두 서글프고 한심하기만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낙이 있다면 자녀교육의 부분이었는데,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아이를 어떻게 양육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모든 교재를 손수 만들고 아이에게 익히게 하고, 최선의 노력으로 아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결과 아이는 한글을 어린 나이에 익히게 되었고,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남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업을 해보겠다며 기술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2,3개월 후 그 업종이 전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너무 힘들어서인지 기술 배우기도 중단해 버렸습니다. 회사를 나오고 1년이 다 되도록 남자는 하는 일 없이 계속 방황만 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먹고 새벽에 들어오기는 일쑤였고, 새벽까지 잠 안자고 기다리는 여자에겐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참다못한 여자가 처음으로 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했더니 그것이 화가 난다고 T.V리모컨을 벽에다 던져 박살을 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무슨 말만 할라치면 무서운 표정을 지었고 여자는 그것에 기가 질려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들에게 두 번째 아이가 생겼습니다. 여자는 생활비를 아껴보려고 자장면 한 그릇이 먹고 싶어도 돈이 아까워서 선뜻 시켜먹지 못했습니다. 남자는 알지 못했습니다. 임신한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를. 심지어 간단하게 도와줄 수 있는 설거지나 청소 같은 것도 거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궁핍한 생활 가운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여자는 두 번째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3일 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여자가 이것이 나의 잘못이냐고 울면서 이야기했더니 그제서야 남자는 완고한 등을 다시 돌렸습니다. 그렇게 둘째 아이가 백일이 될 즈음, 여자의 언니가 울산에 직장이 있다며 이사오기를 제안했습니다. 고심 끝에 남자와 여자는 울산으로 이사하기를 결심했고 2001년 3월 17일 무언가 모를 희망을 안고(남자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울산에 짐을 풀었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직장은 조건이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근무시간, 작업환경, 월급 등... 남자는 회사를 옮겨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그들의 아이들과 울산에 온지 3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동안 옮겨 다닌 곳 만해도 대여섯 군데나 됩니다. 그들이 울산에 이사 오면서 경주에 있는 여자의 언니도 함께 이사를 왔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가 가까운 곳에 있게 되니 좋은 점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에 다시 다닌 것인데, 교회를 정하기 어려워 수개월동안 떠돌이처럼 돌아다녔습니다. 처음 울산에 왔을 때 남자는 여자에게 그동안 못해준 사랑과 배려를 다 베풀기라도 할 것처럼 잘 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집안 살림을 도와준 것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울산에 오면서 여자는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강한 열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번역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고,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며, 살림을 하며,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상황적으로 너무 어려웠지만, 여자는 자신의 삶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굳혔습니다. 새벽에 깨어 공부를 하며,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 지금 다니는 교회를 동생의 권유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여자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삶을 자유케 하는 진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기 시작하자, 남자의 모진 핍박도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하는 일마다 반대했고, 여자의 모든 의견에 무시와 반박을 했습니다. 외박을 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갔고,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밖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집에서라도 꼭 술을 마셔야 했습니다. 술을 마시면 끊임없이 한숨을 토해냈고, 자주 이혼하기를 요구해 왔습니다. 아무런 삶의 대책도 없이 이혼만 하면 자신의 인생이 확 트이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남자는 좌절과 회의를 넘어 자포자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삶의 목표를 확고히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새로운 비전을 가지게 되었고, 남자가 그 모든 노력을 ‘치맛바람’이라고 비하시켜도 여자의 교육철학을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하는 공부에 대해서도 ‘쓸데없는 짓’이라며 무시하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그럴수록 여자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더 큰 열심으로 공부했고, 아이들에게도 교육계획을 하나씩 실행해 나갔습니다. 그때 남자에게는 또 한가지 나쁜 버릇이 생겼습니다. 틈만 나면 인터넷 성인 사이트에서 음란물을 즐겨봤고 밤에도 혼자 포르노 테입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궈 놓고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그 음란물을 마음껏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행태는 부부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올바르지 못한 성행위를 요구했고 여자는 그 요구에 응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시도 때도 없이 성관계를 요구했고, 공부하느라 피곤한 여자는 남자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요구를 들어줄 상황이 안 되어도 남자는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하기 원했고, 여자는 그렇게 관계를 맺고 나면 한없이 비참해지고 괴로웠습니다. 그런 기간이 어느 정도 지속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여자는 자신의 몸을 함부로 내어주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몸을 지키는 것이 정신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남자는 하룻밤 사이에도 몇 번씩 여자를 잠 못자게 했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게 됨을 알면 손찌검도 불사했고, 손톱으로 몸을 할퀴는가 하면 심지어 발로 차기까지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여자의 몸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기도 하고, 손톱에 살이 패여 쓰라린 상처가 남아 있기도 하고 온몸이 욱신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생활이 힘들어도 참다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또 남자는 최근 1년동안 생활비도 제대로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그들 집 냉장고에는 물보다 술이 더 많고, 반찬보다 술안주가 더 많습니다. 생활비를 주지 않게 되자, 여자는 아이들과 반찬 없이 밥을 먹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김치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나마 그것으로 여자는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술이 부르트고 몸이 마르는 것을 보며 여자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성장기의 영양상태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한번은 목욕탕에 가고 싶어 목욕비를 달라고 했더니 들은 척도 하지 않기에 이틀이나 졸라서 만원을 받아냈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먹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은 뭐든지 먹고, 삽니다. 그리고 수백만원씩 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즐기는 듯 했습니다. 카드이용대금 명세서속에는 술집 이름과 수십만원부터 백만원이 넘는 금액이 기재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번 돈 자기가 쓴다는 식으로 당당한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자는 남자에게 단 한마디만 했습니다. “그렇게 술 마시고 다니니까 행복해요?” 하지만 남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질문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어떡해서든 술자리를 만들려고 했고, 사람들과 만나서 술 먹고 술값 치르는 것이 자신의 대인관계를 좋게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가 자장면 값까지 아껴가며 저축한 돈을 남자는 수개월 만에 모두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또 남자는 걸핏하면 여자에게 말합니다. “니가 이제까지 가정에서 한 게 뭐야? 뭐 한 게 있으면 말해봐.” 그리고 이제 이혼을 요구합니다. 남자는 자신의 인생이 풀리지 않는 이유를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혼서류를 가지고 와서 당장 이혼하자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이혼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충격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환경이 바뀌게 되면 그들이 받게 될 충격과 상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자는 이혼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남자가 삶에 아무런 계획이나 대책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이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여자를 향해 남자는 이를 악물고 소리칩니다. “이혼 못하겠다면 네 발로 뛰쳐나가게 해주지. 두고 봐!” 남자의 악기어린 협박이 무섭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날마다 꿈을 향해 날개를 펴도 부족한 아이들에게 좌절과 상처를 줄까봐 걱정이 됩니다. 이 글을 쓰기까지 참으로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세월의 상처는 묻어두면 아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여자가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위해 전문가에게 의뢰하자고 제안했으나, 남자는 돈이 아까워서 그런 짓은 못한다고 합니다. 여자는 자신의 손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싶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면 빈정대며 비꼬기만 하고, 생각차이가 너무 심해서 더 이상 못살겠다고 그것을 이혼사유와 결부시킵니다. 여자는 아이들이 남의 손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자라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악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봐서는 안 되는 T.Vprogram을 아무 거리낌 없이 틀어놓고, 술 마시는 모습, 담배피우는 모습, 게으른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내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남자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이제 36세가 되었고 여자는 32세가 되었습니다. 결혼하지 9년째,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고 싶습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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