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가족치료연구소

한국사티어가족상담교육원(백업) 


성서의 가족에 대한 가족치료적 관점에서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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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famil 댓글 0건 조회 3,300회 작성일 08-05-27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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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가족에 대한 가족치료적 관점에서의 해석

1999년 10월 2일 목회상담학회 특강




오랫동안 많은 가족들을 상담하면서 또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조금 더 일찍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좀 더 행복하고 건강한 가족을 이루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곤 합니다. 우리들은 우둔하여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에야 겨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후회하곤 합니다. 특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 문제, 부부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님들은 더 큰 수치심과 죄책감에 빠져 종종 신앙생활에 대해 회의적이 되기도 합니다.




가족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다보면 간혹 부모님들의 죄책감을 더욱 부채질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문제가 전부 우리 자신의 문제 때문에 생겨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적인 성격, 자녀의 타고난 성격, 피치 못할 시대적 어려움, 사회적 환경 등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가족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에 소속되고, 가족은 구성원들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 대처방법을 형성하는 데 직접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가족의 영향을 심각하게 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15년 전 처음 유학을 갔을 때 우리는 필수적으로 알코올 중독 가족에 대한 이론을 배우고 임상실습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알코올 중독 가족이야말로 문제 가족의 표본이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성격문제라든가 가족문제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 자신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한국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이러한 역기능가족의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우리 사회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존중되지 못하는 남녀차별의 사회구조와 관계성을 매우 중요시여기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족문제를 다루다 보면 언제나 문제의 밑바닥에는 남성중심의 가족주의로 인한 역기능이 대대로 전달되어 여성뿐만 아니라 가족전체가 역기능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남성중심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의 주어진 능력과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욕구가 자연스럽게 펼쳐지지 못하면 왜곡된 모습으로 타인을 조절하려 하거나 자기 패배적인 방법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사회내의 가족관계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도 남성 중심적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족의 문제들을 조장하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는 운명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힘든 가족 내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성격적 문제가 오늘날 그 자신을 있게 한 힘이 되어주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그 대처방법이 지나치게 발달하였거나, 지금은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에 익숙하여 반복한다던가 또는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혹은 그 방법 아니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다른 유용한 방법들을 배우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변화의 과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르는 것을 깨우칠 수 있는 통찰력을 주시고, 통찰력을 통해 배운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알지 못하고 반복하던 행동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형성하게 되면 우리에게 새 삶이 열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가족은 두 사람이 맺어짐으로써 새롭게 탄생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가족은 오직 두 사람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가족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온 모든 경험, 특히 자라온 가족으로부터 부부관계, 자녀관계, 여러 가지 행동양식, 가치관 등을 그대로 지니고 결합된 가족입니다.




부부는 비슷한 수준의 자존감을 가진 사람끼리 만납니다. 건강한 사람은 높은 수준의 자존감을 가진 사람으로, 자기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남의 권리를 해치지 않으면서 나의 욕구를 건강하게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의 욕구도 중요하게 여길 줄 압니다. 따라서 이런 두 사람이 만났을 때는 서로의 독특성을 인정하고 차이점을 받아들이며, 서로가 자율적이고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버텨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부는 자녀들에게 분명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통하여 친밀감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갈등해결 방법을 보여주고, 건전한 가치관을 제시하며, 긍정적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거나, 지나치게 통제를 당하였거나, 과보호로 키워졌거나, 부모 사이가 나빴다거나, 부모가 방임을 하였거나, 학대를 하였거나, 외부환경이 지나치게 열악하였다던가, 심각한 사고를 당한 후 그 충격에서 회복되지 못하였거나, 신체적으로 열등한 경우 자존감 형성에 방해를 받게 됩니다. 이런 외부 환경으로 자존감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사람은 배우자가 자기의 부족한 것을 채워줄 것이라 믿고 결혼하지만 결혼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의 부족한 느낌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만큼 혹은 더 심하게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은 많이 싸우거나 혹은 소원해져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문제를 드러내게 됩니다. 배우자가 채워주지 못하는 친밀감을 자식을 통하여 얻고자 하거나, 부정적 감정을 자녀에게 퍼붓거나, 자기의 문제에 휩싸여 자녀의 복지에 전혀 관심이 없게 됩니다. 결국 부부의 불안정한 관계로 인한 긴장감이 자녀에게 옮겨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불안하게 여겨집니다. 이들은 이 불안감을 도피하여 해결하려 하거나 외부의 것을 통제함으로써 감소시키고자 합니다. 부모 사이의 긴장이 만성적인 집안에서 자란 자녀는 지속적으로 외부 특히 부모에게 관심을 쏟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기 내면의 욕구충족보다는 외부를 통제함으로써 불안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중독증 부부의 경우, 한 사람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물질에 매달리며, 배우자는 바로 이러한 배우자의 충동성을 통제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불안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자기내면은 점차 더 공허해지게 되고, 이렇게 공허해지면 질수록 더욱 외부의 것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배우자나 자녀를 나의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삼게 되며,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상대방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결국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부부는 원가족에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양식을 자신의 부부관계에서 자녀와의 삼각관계, 가족과의 정서적 단절, 부모의 문제를 자녀에게 투사하는 과정 등을 통하여 자녀세대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가족은 어느 정도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기능 가족의 자녀라고 해서 반드시 문제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한 친구, 이웃, 선생님, 교회가 개입하게 되면 어려움을 딛고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문제를 극복하고 자신에게 집중되던 에너지를 고통받는 이웃으로 넓혀 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서 역기능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반복하여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역기능적인 상호관계양식들을 찾아내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들의 가족관계를 예로 가족치료적인 관점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안전감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자녀들




어린아이들은 절대적 의존욕구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외부세계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혼돈 속에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혼돈을 조직하고 체계화하여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삶의 생존양식을 만들어 갑니다. 이 준비기간 동안 아이들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여야 하고, 부모는 아이의 절대적 의존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합니다. 절대적 의존욕구가 적절하게 채워지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감소하면서 자율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존재적 불안을 느끼게 되고, 성장한 후에는 이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권력, 돈, 힘 등에 의존하려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일관성 있게 지켜나갈 때 안전감을 느끼고 자기를 조절하는 능력을 배우고 자율성을 키웁니다. 어린 아이 같은 부모, 지나치게 아이들을 과보호하면서 통제하는 부모, 부모역할을 경험하지 못한 부모, 편부모로서 자녀를 배우자와 같이 여기는 부모 등은 적절한 부모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며, 이 때 아이들은 심한 불안감을 경험하게 되고 내적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성서의 롯도 부모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아무리 삼촌과 할아버지가 잘 돌보아 주었어도 삶에 대해 안전감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세상이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을 단단히 무장하려 합니다. 간혹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보호방어막을 깨지 못하여 가족과도 담을 쌓고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감이 결여되어 타인이 나의 삶을 결정해주기를 바라는 경우를 봅니다. 때로는 이 둘을 왔다갔다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를 보호하기에 급급해서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우유부단하여, 어린 롯에게 선택권을 가지라 하였고, 불안한 롯은 삼촌에게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안전감을 제공하는 물질을 기준으로 소돔을 선택합니다. 소돔 사람들이 나그네를 대접하였다 하여 그의 집을 둘러싸자 요구하지도 않는 딸 둘을 냉큼 내놓겠다고 하는 것은 보호자로서의 아비의 모습보다는 자기 안전에 급급한 불쌍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이 불안한 사람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인도 소돔의 땅을 못 잊어 뒤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고 사실을 보면 두 사람의 심리적 성숙도가 비슷하지 않았나 합니다. 흔히 남녀가 만날 때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외부적 여건이 어떠하든 내면적 성숙도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난다는 것이 이론적 설명이고 실제 임상에서도 흔히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곤 합니다.




물질적 소유 즉 외부의 것으로 불안감을 해소하려던 롯은 소돔에서 도망 나올 때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절히 소원하고, 천사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롯의 기본적 불안감은 소돔의 위기로 극치에 달하였으며 결국 그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하여 세상과 단절된 폐쇄적 가족이 되어 딸과 아버지가 근친상간하는 역기능 가족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만일에 롯이 천사들의 개입이나 작은아버지의 사랑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었다면 롯도 육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한 불안감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많은 축복을 받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부부관계가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




아이들은 점차 성장하면서 사회가 규정짓는 정상적인 범주에 소속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서구사회에서 구성원은 각각의 단위로 사회집단에 소속되지만 가족중심사회인 우리 나라에서는 가족내의 일원으로서 사회에 소속됩니다. 즉,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 개인의 독창성보다는 가족과 사회의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가족이 사회가 규정짓는 정상적인 구조에서 벗어나는 경우 서구사회의 자녀보다 우리 사회의 자녀들이 더욱 수치심을 느끼게 되며,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가 무너질 때 자녀들은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부부가 몹시 사이가 안 좋을 때, 부모가 이혼하였을 때,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일 때, 부모가 부모답지 못할 때, 부모가 폭력적일 때, 부모가 외도를 할 때, 더 나아가 다른 가정을 꾸리거나 혹은 외도로 얻은 자녀를 데리고 들어올 때, 부모가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태어났을 때 등, 가족이 사회가 규정짓는 정상성에서 벗어날 때 아이들은 자기가 속한 가족의 비정상성에서 야기되는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감정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방어기제들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특히 부모의 외도는 자녀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가족관계에서 신뢰가 깨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자녀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됩니다. 외도는 부부관계의 문제입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에 문제의 원인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에서도 비정상적인 가족구조로 인한 문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이 좋아 보입니다.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롯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나그네에게 대접을 잘하고, 부인의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러나 한편 자신의 안전에 위협을 느끼자 부인을 대뜸 적의 품에 내놓으려 합니다. 또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해 불평을 하자 갈등을 잘 해결하기보다는 하갈과 자기 자식인 이스마엘을 광야로 보내버립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이면에는 우유부단하고 성숙하지 못한 면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리라 할 때 비웃고, 아브라함을 설득하여 하갈을 들이고, 또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것으로 미루어 자기판단과 주장이 강한 여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가부장제의 가치관을 내면화하여 어쩔 수 없이 젊은 여인을 남편에게 마련하여 주었지만 사라 역시 하갈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두 여인의 관계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가부장제의 문제가 두 여인의 문제로 되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같이 부부관계가 정상적이 아닌 가족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건강한 인간관계양식을 배우지 못하고, 흑백논리가 강하고, 자기중심적 가치판단을 하고,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경쟁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우유부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가족으로부터 경험한 불공평함을 세상에 투사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비판하게 되거나 인간관계를 적대적으로 몰고 가게 됩니다. 이들은 인간에 대한 배신감, 불신감, 수치심과 분노를 경험하게 됩니다. 딸은 남성들에게 부정적 감정을 지니게 되어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성적 대상으로서 자기의 가치를 찾고자 합니다. 아들들 역시 적절한 남성의 역할을 배우지 못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줄 모르거나, 아버지와 같이 잘못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상대방을 학대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 성격적 문제, 가족의 역기능 등 다양한 모습으로 인하여 우리는 서로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은 부족한 인간사에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축복하시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사라, 이삭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쫓아낸 하갈도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잘못된 삶의 양식을 반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를 똑같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남성중심의 가족제도로 인한 문제가족




젊은 후처가 있는 사라는 아브라함의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라는 남편에게서 받아야할 사랑을 아마도 아들 이삭을 통해서 받고자 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라는 삶의 가치를 아들 이삭에게 걸게 되면서 사라와 이삭은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인 관계 즉, 공생, 용해, 밀착 관계를 형성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관계가 심각해지면 자녀는 정신분열증, 경계선적 인격장애, 정체감 상실 등의 다양한 성격적 문제를 지니게 됩니다.




두려움이 많았던 이삭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위기에 처하였을 때 부인을 내버리려하고,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만 믿고, 부모로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장남으로서 어머니와의 밀착관계, 아버지와의 거리감은 부모, 자녀의 삼각관계를 형성하였고, 이삭의 성격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자아정체감의 혼돈, 부부관계에 대한 회의, 부모역할에 대한 자신감 결여 등이 아마도 이삭으로 하여금 40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하게 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혼도 부인이 어머니를 대치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머니와 비슷하게 자기주장이 분명한 리브가와 만난 이삭은 어머니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위로 받았다고 성서는 적고 있는데 어머니 대신 리브가와 의존적 부부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사라가 오래 살았으면 고부간의 갈등이 반드시 있었으리라 믿어집니다.




게다가 이삭의 경우처럼 가계를 이어가야 하는 장남의 경우에는 흔히 가족에 대한 의무감,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야 하는 압박감으로 인하여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공허해지거나 무력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삭은 조용한 내향형에 따뜻한 인간관계를 원하며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는 성격을 가진 듯이 보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성격적으로 꽤 비슷합니다. 장남은 부모의 사랑이 버겁지만 부모에 대한 충성심 또한 매우 깊습니다. 이삭의 모리아 산에서의 경험은 사랑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언제든 자기를 버릴 수 있는 무서운 아버지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번제에 바칠 어린 양이 어디 있는가 궁금해하는 모습에서 혼돈과 두려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들의 수준에서 상황을 해석하고 그 해석이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아마도 이삭은 아버지의 믿음을 이해하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분노가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억압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결국 이삭은 본래의 성격적 경향에다 분노를 억압하였기 때문에 못 보게 되었고,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장자의 축복을 주고자 할 때에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판단하려 하였던 것은 자신이 경험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삭은 장남으로서 받았던 짐이자 특권을 장남 에서에게 물려주려 하였으나 경쟁적인 집안에서 자란 이삭의 부인 리브가 역시 건강한 자존감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삭에 반응하여 작은아들과 밀착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괄괄한 장남 에서와는 달리 야곱은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조용하지만 수동적 공격형의 사람처럼 꾀를 부려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그의 삶의 대처양식은 스스로를 자승자박하고 맙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상처로 인해 형성된 대처양식 때문에 삶이 엉망진창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천사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을 통해 상처로 인해 잘못 형성된 자기를 적나라하게 보면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게 되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적절한 부모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가족의 자녀들




건강한 부부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부모들은 부모역할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부모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교육에 대한 의견일치를 이루어 부부가 일관적 태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관성이란 허용할 것과 허용하여서는 안될 것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대와 마찬가지로 방임과 과보호도 자녀교육에 해를 끼칩니다. 즉, 일치성과 일관성은 자녀교육에 어떤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이 불가능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선을 그어 지속적으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를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게 되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부부가 형제간의 갈등을 일으켰던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못하였듯이 이삭과 리브가도 에서가 헷족속의 여자를 맞을 때 마음에 근심만 하였지 방임적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방임과 수용은 매우 다릅니다. 수용은 아이들 그대로의 모습을 귀히 여겨 받아들이되 그 모습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분명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 지키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방임은 자녀에 대한 무관심, 교육에 대한 자신감 부족 등으로 부모의 교육 의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방임과 더불어 잘못된 자녀교육의 또다른 형태 중의 하나는 충동적으로 자녀를 대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감정에 따라 아이들을 대할 때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합니다. 편애 또한 자녀교육에 매우 해를 끼치는데 부모가 서로 다른 자녀에 대해 편애하는 것은 숨겨진 부부갈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서로를 비난하고, 가인과 아벨에 대해 편애한 것이 형제간에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도 에서와 야곱을 편애하게 되면서 형제간의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야곱 역시 요셉만을 편애하여 피비린내 나는 형제간의 갈등을 촉발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편애는 아이를 수용하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자기의 연장으로 보고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하고픈 욕구는 생존과 관계되기 때문에 절실한 것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분노가 생기는데 이 분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죄책감 때문에 억압하게 되면 분노뿐만 아니라 사랑의 감정까지도 억압하게 됩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분노는 다른 인간관계에서 특히 자신의 가족관계에서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들고 나옵니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적대적 대우를 경험하여 느끼는 분노는 부모들이 부모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식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해결될 수 있습니다. 혹은 자녀들이 부모들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나 부모들의 성장배경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해결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믿음의 조상들의 가계와 마찬가지로 역기능이 다음 세대에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의 가족관계가 역기능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간섭하시고 축복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치유는 우리 가족, 내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 과정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인하여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갈 때 가능합니다.







지나치게 빨리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는 아이




사람은 태어나면서 각자만의 고유성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가족에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말 그대로 가족의 연속극의 한 단원이 되어 드라마에 참여하게 됩니다. 많은 학자들은 아이들이 0세부터 5, 6세까지 삶의 양식을 형성하는데, 그 방법은 부모들에 의하여 형성된다고 봅니다. 부모들 역시 그들의 부모에 의하여 짜여진 각본대로 살아 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가면서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각본을 형성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 각본은 주어진 것이지 아이가 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 각본에서는 때로는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배역을 맡길 때도 있습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어렸을 때부터 가정경제를 도와야 한다든지, 부모 중 한 분이 안 계셔 부모의 배역을 아이가 맡아야 한다든지, 성격과는 전혀 다른 배역을 맡긴다든지, 부모가 사이가 안 좋아 부모 사이를 왔다갔다해야 한다든지, 부모의 배우자 역할을 하여야 한다든지, 불쌍한 아버지나 어머니를 구제하는 역할을 해야하는 다양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성장과정에 맞게 적절한 경험을 하면서 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동안의 세월만큼 비어 있는 듯하게 느껴집니다. 즉, 어린 시절에 어린이다운 삶을 살지 못하였다면 내면 속의 어린아이는 그대로 남게 되고, 겉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빈 공간은 공허감을 불러일으키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아 우울하거나 삶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가 되어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 같은 미성숙한 행동을 충동적으로 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조건부로 자녀를 인정하게 되면 자녀는 부모중심, 타인중심으로 행동하게 되어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외부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치게 발달하여 자신의 욕구는 다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욕구에 맞추어 살려고 하는 자가 됩니다. 결국 자기를 상실하게 됩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경쟁적인 것을 보면 그녀의 다른 형제들도 경쟁적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리브가의 남자 형제의 딸들인 레아와 라헬도 경쟁적이었으며 라헬도 욕심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에서와 야곱의 관계양식과 레아와 라헬의 관계양식이 유사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레아와 결혼한 야곱과 레아의 부부관계는 무척 나빴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여러 이유로 맺어진 부부들은 결국 자녀의 한 사람에게 배우자와의 정서적 관계를 맺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아이는 어른 역할을 하는 부모화된 자녀가 되어 어린시절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르우벤 역시 어머니와 밀착관계에 놓였던 것 같습니다. 르우벤은 끊임없이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고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아의 경우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열등감을 원래 가지고 있는 데다 남편에게서 거부당하고 사랑 받지 못하는 한을 자식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풀려고 하였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자식은 사랑을 받아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주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부모역할을 하는 자녀는 부모들이 해야하는 부모역할 즉 어린 자녀들을 보살피고, 돌보고, 보호하는 부모노릇을 해야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런 경우 부모와 자녀 사이의 세대간의 경계선이 불분명하여집니다. 결국 르우벤도 비록 나이 차이는 많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부모세대인 아버지의 첩인 여종과 관계를 맺게 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역기능 가족의 문제로 인한 희생양인 르우벤은 아버지의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죄의식에서 평생 벗어나기가 힘들게 됩니다.







건강한 가족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가족




요셉은 마리아가 정혼한 후에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부장사회에서 정혼한 여자가 잉태하였다면 그 여자를 받아들일 남성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고, 끝까지 정혼한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처럼 약혼자(부부)로서 가장 힘든 위기상황에서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마리아 자신도 믿기 어려운 예수의 잉태를 요셉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두 사람의 인격이 성숙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를 성전에서 잃어버렸을 때 물론 부모로서 몹시 걱정하였지만 어린 예수가 부모와 떨어져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였다는 것은 부모가 과보호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가 부모에게 자신의 의견을 명료하게 펼치고, 마리아 역시 어린 예수의 말을 마음에 간직한 것으로 미루어 예수님과 부모님과의 관계는 건강한 부모자녀관계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성장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졌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맺을 능력이 예수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가족체계론으로 본다면 예수는 부모와 건강한 사랑을 경험하고, 적절하게 분리하여 높은 자존감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짧게나마 성서에 비추어 우리 가족의 문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도 역기능적이었고, 때로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직접 혹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신약시대에는 성령으로 우리의 삶에 지속적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우리를 돕고자 하는 손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듯이 우리를 돕는 손길들도 다양합니다. 또 우리 자신이 천사처럼 다양한 형태로 다른 사람을 돕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손길을 믿고,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손길을 의지하여 변화하고자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역기능적 가족의 굴레에 매이지 않고 우리의 문제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잘못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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